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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Zena 작성일25-08-11 02:27 조회2회 댓글0건본문
아일랜드최근 UFC 무료 PC 주말 수정 시각: 2023-03-29 20:04:50 1. 개요[편집]영국의 서쪽 아일랜드섬 대부분을 통치하는 서유럽의 섬나라이다. 수도는 더블린이다.2. 국가 상징[편집]2.1. 국호[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국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airteaGal 4Éire is ainm don Stát nó, sa Sacs-Bhéarla, Ireland.Article 4The name of the State is Éire, or, in the English language, Ireland.제4조나라의 이름은 에이레, 혹은 영어로 아일랜드이다.아일랜드 헌법(아일랜드어)아일랜드 헌법(영어)아일랜드 헌법에 따른 아일랜드어 정식 명칭은 에이레(Éire [ˈeːɾʲə], 빛의 여신 에일린의 이름을 딴 것)[1]라고 하고 영어로는 아일랜드(Ireland)라고 한다. 켈트 신화에 나오는 에린이 바로 이곳이다. 영어명인 아일랜드(Ireland) 역시 이 Eire와 land가 합쳐진 것[2]이다. 한편 1948년에 제정된 아일랜드 공화국법(Republic of Ireland Act 1948)에서는 이 국가를 '아일랜드 공화국(영어로 Republic of Ireland, 아일랜드어로 Poblacht na hÉireann)'이라 하고 있지만 이는 자국의 정체에 대한 description일 뿐 name인 것은 아니다. 헌법에서 자국명을 Ireland로 아예 못박았기에 모순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아일랜드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의 통치 지역을 북아일랜드와 대비해 '남아일랜드'(Southern Ireland, Deisceart Éireann)라 칭하기도 했다. 1949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라 칭하고 있다. 오늘날 독립국 아일랜드의 전신인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아일랜드 자유국이 국호를 에이레(Éire) 또는 아일랜드로 고친 1937년부터 완전한 공화국이 되는 1949년까지 영국 정부는 Eire(보조 부호 삭제) 또는 드물게 Éire로 지칭하여 Ireland와 구분지었는데 영국 정부는 Ireland를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지리적 명칭으로 고정시키고 아일랜드 자유국이 이름을 바꾼 에이레/아일랜드를 Eire로 고정시켜 양자의 의미를 확실히 구분지은 것이다. 아일랜드가 1990년대 말 벨파스트 협정과 헌법 개정을 하기 전까지 아일랜드섬 전체를 명목상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영국이 영유권 주장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이렇게 했다.아일랜드가 1948년에 아일랜드 공화국법(Republic of Ireland Act)를 통과시켜 스스로가 공화국이라고 규정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헌법상 Éire, 영어로 Ireland인 건 변함이 없었고 Republic of Ireland의 Republic of는 국호의 일부가 아니라 정치 체제의 설명(description)이었기에 영국의 Republic of Ireland라는 표기는 아일랜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다. 물론 영국 정부가 Republic of Ireland라는 표기를 쓴 건 Ireland(아일랜드섬 전체)와 구분지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탓에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정부(Government of Ireland), 아일랜드 대통령(President of Ireland) 같은 아일랜드 측이 사용하는 공식 표현을 무시하고 Irish Government, Irish President로 돌려 쓰게 된다. 반면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공식 국호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을 인정할 수 없어서 공식 국호의 사용을 거부하고 약칭 United Kingdom(UK)로만 표기하거나 지리적으로 Great Britain 또는 형용사로 British 등을 이용해 돌려 썼다.이런 양국의 명칭 분쟁은 벨파스트 협정을 체결하고 아일랜드가 헌법에서 영토 조항을 삭제하여 해소된다. 그래서 현재는 Ireland의 의미가 아일랜드섬 전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의미한다는 걸 명확히 할 때에만 Republic of Ireland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외에는 그냥 아일랜드 측이 쓰는 공식 명칭을 쓴다. 벨파스트 협정의 두번째 협정 이름도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THE GOVERNMENT OF IRELAND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표제어를 Ireland는 아일랜드섬을, 국가는 Republic of Ireland를 사용하지만, 다른 언어 문서에서는 아일랜드섬은 그냥 아일랜드(섬)이고 국가는 아일랜드(국가) 혹은 아일랜드로 표기한다.그래서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라는 국호는 공식 국호도 아닐 뿐더러 아일랜드에서는 그다지 선호되는 명칭이 아니다. 아예 유럽연합 차원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이라고 표기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FIFA에서는 북아일랜드를 Northern Ireland, 독립국 아일랜드를 Republic of Ireland로 표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FIFA에서는 아일랜드 팀이 스스로 이 표기를 쓰고 있다.아일랜드를 일컫는 표현으로는 Irish Republic도 있다.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이 선포했던 국호로 한국어로는 Republic of Ireland나 Irish Republic이나 '아일랜드 공화국'이라고 번역될 수 있지만 아일랜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본래 아일랜드섬 전체 독립을 원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선포된 국호여서 둘은 내포하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실제 독립 과정에서는 국력의 현격한 차이로 투쟁에 한계를 보인 아일랜드 독립 진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지치고 국내 반전 여론을 우려했던 영국이 서로 타협해 북아일랜드를 떼놓은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다. 1932년 명분 상 아일랜드 통일을 추구했던 에이먼 데 벌레라와 아일랜드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국명을 'Eire'로 변경하자 영국 측에서는 독립국 'Eire'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고 북아일랜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맥락에서 'Republic of Ireland'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강성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에서 Irish Republic이라는 표현을 즐겨쓴다. 그렇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나 담화가 아닌 일반인들의 비공식적인 표현이나 언론 매체의 표기 등에서 현재의 아일랜드를 Irish Republic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아일랜드어로는 Irish Republic 그리고 Republic of Ireland 모두 Poblacht na hÉireann이라고 하므로 이런 문제가 없다.영어 발음으로는 /ˈaɪələnd/이다. 이를 한글 표기로 옮기면 '아이얼런드'가 되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정확한 표기는 '아이얼랜드'이지만 섬(island)과 혼동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국어원에서는 관용적으로 쓰인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표기만을 고집하고 있다.한자 음차로는 애란(愛蘭). 쓰이는 일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대 기록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 애란토(愛蘭土), 애이란(愛爾蘭) 등의 음차 표기도 있다.2.2. 국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언 우라터흐 나슌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2.3. 국가[편집]2.3.1. 전사의 노래[편집] 자세한 내용은 Amhrán na bhFiann 문서를 참고하십시오.2.3.2. 아일랜드의 부름[편집]아일랜드의 부름(Ireland's Call)은 아일랜드 럭비 유니언에서 작곡한 곡으로 럭비 세계 대회에서 주로 국가 대신 불리던 곡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럭비를 포함하여 아일랜드 하키, 크리켓, 코프볼 등 여러 스포츠의 세계 리그에서 국가 대신 제창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영어 가사만 있지만 비공식 아일랜드어 가사도 몇 개 있다.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무적핑크가 설명하는 아일랜드의 역사1. 개요[편집]짧게 보는 아일랜드의 역사.유럽 대륙과 브리튼 섬에서 게르만족으로부터 밀려난 켈트족이 마지막까지 버틴 지역으로 현재 남아 있는 켈트 신화 중 대다수는 아일랜드 출전이다. 나머지는 웨일스 신화 정도.아일랜드와 영국을 각각 한국과 일본으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말해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한정으로만 비슷하다. 한국은 유럽 대륙에서도 보기 힘들게 외세의 지배된 왕조가 전혀 없었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한국계 고유 왕조가 한반도에서 지속되었다. 반면 아일랜드는 이미 한국사에서 고려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2세기 잉글랜드에 정복당해 20세기 초까지 무려 800년 가까이 영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스코틀랜드보다도 훨씬 먼저 잉글랜드-영국에 소속되었고 영국 정부도 아일랜드 섬은 식민지가 아닌 본토의 일부로 간주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독립 이전의 아일랜드는 영국의 구 식민지가 아닌 영국에서 이탈한 구 본토이다.[1] 너무나 당연히 한국사의 본토로 인식되는 함경도가 여말선초기인 14~15세기에 고려-조선이 정벌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일랜드가 얼마나 오래 전에 영국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가 영국의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였다는 말은 아일랜드가 현대 독립 국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쳐지는 것일 뿐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대부터 국가 간 정체성 차이가 명확했던 동아시아 문화와 일제강점기라는 근대사에 익숙한 상당수 한국인들이 세계 각지의 분리주의 운동을 일제와 한국 독립운동에 일대일로 빗대 식민지배자와 피지배민족의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으나 봉건제 역사가 깊고 민족 개념이 근대에야 보편화된 유럽의 민족 문제는 마냥 이런 단순한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복잡하다. 아일랜드의 경우에도 이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잉글랜드 출신 집안이 후대에 과격 독립파가 되고 개신교로 개종한 얼스터 토착 게일인이 극렬 연합주의자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근대 민족주의 발흥 이전에는 켈트 vs 앵글로색슨의 민족 정체성보다는 가톨릭 vs 개신교의 종교 정체성 차이가 핍박과 차별에 있어서 더 중요했다. 종교 정체성 차이와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영국인으로 동화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민족 독립 의식에 불이 붙어 결국 독립에 성공한 것이다.2. 구석기[편집]12,500년 전 ~ 10,000년 전최후 빙기 시절 빙하의 이동과 인간의 유입구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움막집.구석기 시대(Palaeolithic)인 약 12,500년 전부터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 섬에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다.왼쪽은 칼 자국이 새겨진 곰의 뼈. 오른쪽은 아일랜드, 클레어의 그웬돌린 동굴.상당한 양의 구석기 시대의 구석기들이 발견되어져 온 반면에 아일랜드에서 구석기 시대의 정착지를 확실하게 찾은 것은 전무하다. 하지만 1903년에 앨리스(Alice)와 클레어(Clare)의 그웬돌린 동굴(Gwendoline Cave)에서 곰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 뼈는 석기들과 더불어 절단 표식의 깨끗한 흔적들이 보이고 방사성 탄소 연대(Radiocarbon dated)가 약 12,500년 전 무렵으로 나왔다.[2]3. 중석기[편집]10,000년 전 ~ 6,000년 전수렵 채집인들의 움막집.중석기 시대(Mesolithic) 이후 북극 만년설들의 후퇴에 따라 기후가 더욱 혹독하게 변화했던 때가 중석기 수렵 채집인들이 아일랜드에 퍼진 가장 이른 시기라 확인되었다.왼쪽은 킬그레니 동굴. 오른쪽은 내부 모습.하지만 아일랜드 남서부에 있는 먼스터(Munster) 지역의 킬그레니 동굴(Kilgreany Cave)에서 발견되어 온 흔적들이 약 11,000년 전일 여지가 있다.[3]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이 연결되어 육로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더 후대의 연구들은 일부 지역들에서 기후가 아직 춥고 그 지역 빙하들이 있었을 때인 약 16,000년 전 무렵에 브리튼 섬 본토로부터 아일랜드 섬이 분리되었다고 보았다.4. 신석기[편집]6,000년 전 ~ 4,500년 전아일랜드식 고인돌.기원전 3200년 전후 아일랜드 미스 주(County Meath) 브루 나 보이네(Brú na Bóinne) 지역 보인 강 북쪽으로 1 km 떨어진 곳에 건설된(지어진) 유명한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통로 돌무덤(Irish Passage Stone Tomb) 유적인 뉴그랜지(Newgrange).[4]신석기 시대(Neolithic)인 약 6,000년 전까지 아일랜드에는 수렵 채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들의 흔적을 보면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베리아인의 한 분파인 것으로 추정된다.코노트 시드 평원(Ceide Fields in Connacht)의 탐험으로 높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와 도기류의 등장에 의한 특징, 정교한 석기들, 직사각형의 나무 집들, 공동 거석 무덤들(Communal Megalithic Tombs)에 이르는 다양한 생활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크노스(Knowth)와 도스(Dowth)에서의 무덤들 중 일부는 거대한 돌 기념물들과 통로 무덤들(Passage Tombs of Newgrange)이 발굴되었다. 고인돌과 코트 케언, 통로 무덤들, 쐐기 모방의 갱도 묘들로 식별되어 온 아일랜드 거석 무덤들(Irish Megalithic Tombs)의 4개의 주된 양식들이다. 렌스터와 먼스터 지방에서 각각의 성인 남성들이 흙 제방들 아래에 조각들이라 불리는 작은 돌 구조물들 안에 매장되었고 독특한 장식이 된 도기류도 있었다. 이 시기에 섬은 인구 밀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신석기 시대 말엽에 가까워질 무렵 원형의 제방 울타리들과 원형의 제방 목재, 돌, 배치되고 움푹 들어간 원들과 같은 새로운 기념물들이 나타났다.5. 청동기[편집]기원전 2500년 ~ 기원전 500년경청동기 시대 초기 아일랜드식 스톤헨지.청동기 시대(Bronze Age)인 약 2,000년 전 무렵 아일랜드에서 정교한 금, 청동 장식, 무기, 도구들의 생산물이 보인다. 공동 거석 무덤들의 건설에서 묘지들, 원형의 대지 또는 석조로 지어진 흙 무덤들, 케언으로 알려진 매장지에 위치 할 수 있는 작은 돌 조각들, 단순한 구덩이들로 죽은 자의 매장에 이르기까지의 움직임이 있었다. 시대의 경과에 따라 흡착 매장은 화장으로 이어졌고 청동기 시대 중기에 유물들은 자주 대형 매장 유골 단지 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민족적 구별이라고 부를 만한 인류 정착이 시작되었고, 현 아일랜드의 원주민인 켈트족의 게일인들이 이때 유입되었다. 신화에서는 밀레시안의 상륙으로 묘사되고 아일랜드 신화 대계(Mythological cycle)의 주 배경이 되는 시대다. 이 당시를 설명하는 후세의 문헌들은 미신적 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 사건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논쟁이 있다.일반적으로 신족인 투아하 데 다난은 그리스도교 상륙 이전 아일랜드의 애니미즘 토속신앙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포보르 역시 허구의 존재거나 비문명화된 야만 부족을 상징한다. 반면에 피르 볼그와 밀레시안은 당시 청동기 부족을 이끌었던 실존하는 연맹 국가와 군장들의 이야기가 다수 포함되었다.6. 철기[편집]기원전 500년경 ~ 기원후 500년경아일랜드의 철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500년 무렵 시작되었다. 기원전 6세기 여러 켈트 왕국들의 흔적들이 문헌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처 브리튼 섬이나 지중해 지역과 교류를 하거나 약탈을 하였다. 철기 후기까지도 아일랜드 역사는 신화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일랜드 신화의 4대 대계 중 얼스터 대계(Ulster Cycle)와 피니언 대계(Fenian Cycle)가 이 시대를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쿠 훌린 같은 영웅들의 활약이 유명하다. 히베르니아 시대나 이베리아인이 정착한 시기도 이때로 추정된다.7. 고대 시대[편집]8세기 무렵 아일랜드 섬의 왕국들을 지배하는 부계 왕조들(Patrilineal Dynasties)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지금의 영국 잉글랜드 지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했을 때도 아일랜드에는 미치지 않아 켈트족의 고유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아일랜드 섬을 '히베르니아(Hibernia)'[5]라고 불렀다. 다만 아일랜드인들은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게일인 시대의 아일랜드는 5~9개[6]의 왕국들로 이루어졌다.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라긴(렌스터), 코나흐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7]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4세기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에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오히려 브리튼 섬의 웨일스(Wales), 콘월(Cornwall)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8] 이들이 그 땅에 세운 왕국들 중에서 단명하지 않은 유명한 국가로는 웨일스 남서부 지역의 더베드(Dyfed) 왕국과 남부 지역의 브레콘(Brycheiniog) 왕국이 있고 둘 다 500년 이상 유지되었다.5세기에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다고 알려진 성 파트리치오(St Padraig, Saint Patrick)도 노예로 잡혀갔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 일련의 선교사들과 함께 켈트족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아일랜드는 기존의 켈트 다신교인 드루이드 신앙 체제가 소멸하고 600년경에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한 것으로 추정된다.8. 중세 시대[편집]8.1. 바이킹의 침략[편집]바이킹의 아일랜드 침략을 묘사한 그림들.바이킹이 아일랜드 섬에 침입한 경로.8세기 말 바이킹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할 무렵에 아일랜드 섬도 약 2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795년에 처음 아일랜드를 공격한 이래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이었다.왼쪽부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 섬에 위치한 라운드 타워.아일랜드 동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원통형의 석탑인 라운드 타워[9]는 중세 시대에 망을 보거나 바이킹의 침략에 대비하고 피하기 위해 지어진 토착민들의 방어 시설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아일랜드로 망명하여 중세 아일랜드는 문예의 부흥기였다. '갤로우글라스'라는 켈트족 전사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로 아일랜드의 학문적 전통이 끊어지고 방대한 기록 유산들이 멸실된다.8.2. 잉글랜드의 침략[편집]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에 올라 '윌리엄 1세'가 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고, 노르만족 기사들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원정에 동행한 노르만족 부하들에게 잉글랜드의 영지를 분배했으나 토지를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노르만계 기사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용병으로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일랜드 섬도 유럽 각지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부 지역의 코노트 왕국(Kingdom of Connacht)의 국왕이 힘을 얻어 이웃 소국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히며 통일 아일랜드의 지배자(High King of Ireland) 자리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남부 지역의 렌스터 왕국(Kingdom of Leinster)이 정복당하자 추방당한 렌스터 왕국의 국왕이 봉신이 되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헨리 2세[10]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헨리 2세가 UFC 무료 PC 주말 거절하자 렌스터 국왕은 잉글랜드 내에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해 왕위를 넘긴다는 대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는 독단적으로 노르만계 기사들을 이끌고 1169년 아일랜드를 침공하며 몇백 년에 걸치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악연이 시작됐다.리처드 드 클레어의 군대가 아일랜드에서 승승장구하자 헨리 2세는 그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됨을 경계했다. 결국 헨리 2세는 당시 교황 하드리아노 4세[11]를 설득해 아일랜드 섬 전체를 잉글랜드에 귀속시킨다는 ;(Laudabiliter)[12]를 받아냈고, 이를 근거로 1171년 손수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 섬의 소왕국들을 복속해 '아일랜드의 영주'(Lord of Ireland)가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력은 더블린 일대[13]나 코크(도시), 리머릭 등 일부 지방 거점에 한정된 것이었고 여전히 게일인 토착 세력들이 아일랜드 각지에 건재했다.[14] 이들 게일인 원주민들을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는 노르만계 잉글랜드인 정착민들에게 영지를 하사해 아일랜드에 장원제를 도입했다. 이렇게 중세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인들은[15] 때때로 잉글랜드 국왕의 편에 서서 게일인들과 충돌했지만 종종 게일인 귀족들과 통혼을 하고,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튜더 왕조가 들어서는 중세 말에는 대부분 동화되어 '아일랜드인'(Irish)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16]9. 근세 시대[편집]사실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국왕들은 아일랜드 통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고[17] 피츠제럴드(FitzGerald) 가문과 버크(Burke) 가문 등을 위시한 토착 귀족들에게 암묵적으로 자율권을 주었다. 그러나 장미 전쟁이 끝나고 들어선 튜더 왕조 이후부터 잉글랜드 국왕들은 직접적으로 아일랜드에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도입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킬데어 백작 토마스 피츠제럴드 등 아일랜드의 유력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한편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워 로마 가톨릭과 결별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겸임하는 '아일랜드의 영주'(Lord of Ireland)라는 지위가 교황의 봉신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고, 1542년에 아일랜드 왕국(Ríocht na hÉireann, Kingdom of Ireland)[18]을 세워 아일랜드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잉글랜드가 성공회를 받아들여 개신교 국가가 되면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는 더욱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몰수해 개신교를 믿는 잉글랜드인들에게 조직적으로 분배[19]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중세시대 아일랜드에 이주한 잉글랜드계 이주민(Old English)들은 가톨릭을 믿고 아일랜드인들에 동화됐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에서 버린 자식 취급하며 배제하고, 이들 대신 성공회를 믿는 새로운 잉글랜드 이주민(New English)들을 새로 이주, 정착시켰다. 이렇게 근세에 새롭게 아일랜드로 이주해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지배계층으로 군림한 잉글랜드계 개신교 이주민들을 앵글로 아이리시(Anglo-Irish)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아일랜드 전역에 토지를 소유하는 지주로 군인들을 많이 배출[20]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독일 제국의 융커들과 비교되기도 한다.[21]한편 이와 별개로 스코틀랜드계 스튜어트 왕조가 잉글랜드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인들도 아일랜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식민정책의 연장으로 북부의 얼스터 지방[22]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토착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장로교를 믿는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을 대거 정착시켰다.[23] 이들을 얼스터 스콧(Ulster Scots) 또는 스카치 아이리시(Scotch Irish)[24]라고 불렀다.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앵글로 아이리시'와 다르게 얼스터 지방에 거주하던 '얼스터 스콧'들은 중소지주나 상공인 등 중하류층 출신들이 많았고, 현지에 뿌리박고 살기 시작하며 17세기 말 얼스터 지역에 적지 않은 개신교 커뮤니티를 형성해 훗날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1641년,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닥친 흉년과 높은 소작료에 폭발한 아일랜드인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온 지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3분의 2를 점령한 아일랜드 반란군들은 곧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Irish Catholic Confederation)을 결성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토벌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찰스 1세와 의회 간의 반목으로 잉글랜드 내전까지 터지자 아일랜드도 이 전쟁에 휘말려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이 아일랜드의 자치권과 가톨릭교도 차별 폐지 등의 조건으로 왕당파 편에 서자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군대가 아일랜드에 상륙해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크롬웰의 군대가 일으킨 학살로 20~30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죽어나갔는데 이는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4분의 1 정도였다. 특히 얼스터 지방에서 반란군의 세가 강했는데 크롬웰은 자신 휘하의 군인들에게 얼스터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하사하고 그들을 모두 아일랜드 서부의 척박한 코노트 지방으로 추방해버렸다.[25][26]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얼스터 지방에서 개신교도의 세가 강해지도록 만들었다.얼스터의 가톨릭교도 원주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쉽사리 동화당하거나 개종하지 않고 영국에 대한 분노를 쌓아갔다. 반란이 꾸준히 터졌고 그때마다 게일인들은 영국계 이주민 정착촌을 공격했다. 영국 통치로 인해 희생된 가톨릭교도들의 수가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이때의 학살 위협이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공포를 자극해 현대까지 영국계 집단 사이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 통일에 반대하는 연합주의가 강해진 원인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한편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스튜어트 왕조가 복귀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가톨릭교도인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게 보상안을 제시하고 가톨릭교도가 공직에 오르는 것을 허용해 아일랜드 개신교도들에게서 반발을 샀다. 결국 명예혁명으로 가톨릭교도였던 제임스 2세가 국외로 추방당하고 그의 딸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이 되자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는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했고, 아일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은 윌리엄 3세를 지지하는 윌리어마이트(Williamite)가 되었다. 결국 아일랜드는 다시 내전(윌리어마이트 전쟁, Williamite War in Irealnd)에 휩싸였고,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제임스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윌리엄 3세의 원정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윌리어마이트 전쟁 이후 아일랜드 사회는 성공회를 믿는 소수의 개신교도들이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가톨릭교도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27]10. 근대 시대[편집]사실 16세기 잉글랜드 종교 개혁[28] 이후 19세기 초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완전 합병까지 아일랜드 왕국의 국교는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였다. 따라서 성공회를 믿고 있던 극소수의 앵글로 아이리시(Anglo-Irish) 주민들을 제외한 가톨릭을 믿던 대다수 아일랜드인들과 장로회를 믿던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스콧(Ulster-Scot) 주민들은 주요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교도들과 일부 개신교도들[29]이 서로 협력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 뛰어들었다.[30] 때마침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은 아일랜드인들은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Society of United Irishmen)를 세우고, 1798년 무장 혁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반란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일랜드를 직할령으로 삼기 위해 1801년 아일랜드 왕국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흡수하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세웠다. 아일랜드가 연합왕국의 구성국이 되면서 영국 정부는 그동안 시행했던 장로회 신자와 가톨릭 신자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향으로 협력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가톨릭과 장로회가 연합한 아일랜드 민족 진영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대니얼 오코넬을 위시한 가톨릭교도들은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아일랜드 자치권 운동(Irish Home Rule movement)을 시작했고[31] 아일랜드가 영국의 직할령으로 남길 바라는 장로회 신자들은 성공회 신자들과 연합해 가톨릭에 맞서는 개신교 연합을 구성했다.[32]이 분열은 훗날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영국에선 가톨릭 vs 개신교의 종교 분쟁으로, 아일랜드에서는 식민 vs 반식민의 이념 분쟁으로 보게 된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구성원들은 대다수의 가톨릭교도[33]+소수의 개신교도[34], 친영 진영은 소수의 가톨릭교도+대다수의 개신교도[35]였다.10.1. 영국 병합[편집]1801년 1월 1일 이전까지는 형식상의 동군연합이었지만 ;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하여 형성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과 아일랜드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으로 병합되어 공식적으로 한 국가가 되었다.10.2. 아일랜드 대기근[편집]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게 된 감자 대기근은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감자가 전래된 후로 아일랜드인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는데[36] 상품상의 이유로 럼퍼[37]라는 이름의 한 가지 품종의 감자만 키우다가 이 품종을 숙주로 하는 전염병이 생겨 1845년에 아일랜드 대기근이 벌어졌다.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수백만명이 병사/아사하고 수백만명이 이민을 가서 인구가 계속 줄어든 이후로 아일랜드 전체의 인구는 아직까지 그때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감자 대기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일랜드에는 밀과 고기 등이 넘쳤기에 그것들만 풀면 대기근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모든 곡식들을 배에 실어서 브리튼 섬으로 운반했고, 영국의 반대로 영국 상인들은 밀을 구호품으로 쓰지 않았다. 이때 다수의 아일랜드인이 굶어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에 타고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서 많은 지역에 아일랜드인 공동체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도 순탄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하얀 흑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낮은 대우와 더불어 차별을 당했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 이주자라면 고장을 불문하고 핍박받는 것이 예사였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No Irish, No Blacks, No Dogs"라는 구호를 보기 힘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일랜드인은 '패디'(Paddy)라고도 불렸는데 '패디 왜건'(Paddy Wagon)은 속어로 경찰차를 뜻하는 말이다. 기근을 피해 피난 온 빈곤층 출신이기도 했고 영국계의 WASP들이 유난히 아일랜드인만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에서도 주인공 잭 도슨이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칼 헉슬리에 의해 천대받고, 로즈와의 교제를 금지당하는 것이나 그 외 모든 아일랜드인은 3등석에서만 탑승하도록 격리 조치를 취한 설정 등이 나온다. 그러나 그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수십년 후에 집중적으로 오기 시작한 이탈리아인에게 엄청 텃세부리고 차별했다.아무튼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심각해졌다. 이 과정에서 입헌 투쟁을 벌였던 19세기 민족주의자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38]의 운동이나 아일랜드어를 살리기 위한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 등의 주도로 일어나기도 했다.11. 현대 시대[편집]아일랜드는 왜 둘로 갈라졌는가?11.1. 자치 운동[편집] 관련 문서: 영국의 자치권 이양내셔널리즘 열풍이 거세게 불자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의지는 점점 강해져갔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수많은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나 번번히 진압되어 독립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영국 영토인만큼 영국 본토처럼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들끓는 여론이 중앙 정치계에 전달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 자유당을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웨일스처럼 현지에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에 관련된 입법 권한의 많은 부분을 영국 중앙 정부 의회에서 새로 생길 아일랜드 자치 의회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 보수당을 중심으로 이 방안에 대해 연합 왕국을 해체할 것이라며 격렬한 반발이 일었고,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게 신교도가 주류였던 얼스터 지역은 자치 방안에 대해 결사 반대했다. 결국 자치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1910년대에는 총선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하원에서 비슷한 의석을 점하고 아일랜드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이 약간 의석을 얻어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립 정부를 꾸리면서 자유당 정부가 아일랜드 의회당의 요구를 반영해 1911년에 ;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보수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거부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하원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39] 바로 국왕 조지 5세에게 법안을 넘겼다. 그러나 이 법안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자 얼스터에서는 난리가 나서 얼스터 연합주의자(친영 진영)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민병대를 구성해 폭력 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지 5세는 법안 재가를 연기했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과 함께 재가하여 아일랜드 자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다.11.2. 독립 운동[편집]이렇게 '합법적' 자치 운동이 지체되자 1916년에는 독립 전쟁의 서막으로 불리는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고, 결국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조직되어 영국에 대한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일부 아일랜드 출신 군인들이 독일군에 협조하여 영국을 뒤에서 치는 계획이 시도되기도 했다.[40]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8년에 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여기서는 신페인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거의 전역의 의석을 석권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지역구에서 당선된 신페인 국회 의원 73명은 당선되자마자 따로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차려 아일랜드 공화국[41]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의회 등원을 거부했으며[42] 이로 인해 이들과 영국 정부 사이에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그 규모로는 영국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므로, 이들은 영국의 공공 기관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영국은 독립 진영의 군사 조직 IRA가 공격에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을 민간인과 구분할 수 없었으므로 아일랜드에 계엄령을 발동해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수색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이 민간인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을 죽이는 일도 있어 아일랜드 민중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높였다. 그리고 이렇게 아일랜드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면 IRA는 더 강경한 공격을 하게 되고 다시 영국군이 강경한 대응을 하는 등 폭력이 끝없이 이어졌다.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더 나아가 투쟁 전선을 잉글랜드로 확대하여 잉글랜드에서도 요인 습격, 공공 기관 습격 등의 군사 행동을 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 본토에도 계엄령을 발동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영국 국민들이 1차 대전에 지쳐 반대하는 바람에 달성되지 못했다.한편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은 1920년에 친영 세력이 많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를 분리해 각각 따로 자치 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남아일랜드의 자치 의회는 128명의 의원 중 친영 진영에 속한 4명을 뺀 124명이 신페인 당원이었고[43] 이들은 자치 의회의 의정 활동을 거부했다.11.3. 아일랜드 자유국과 내전[편집]결국 영국은 1921년에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캐나다, 호주와 같은 자치령으로 지정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게 자치령 지정은 못미더운 것이었다. 자치령은 비록 폭넓은 자치를 누리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을 영국 본국이 갖고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섬겨 아일랜드에 그를 대리하는 총독을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완전한 독립국 아일랜드의 건설을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령 지정을 약조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서 신교도가 다수인 얼스터 지역 6주를 영국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남길 것을 규정하자[44] 아일랜드 독립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분열했다. 조약 찬성파는 조약이 못미더웠지만 이것을 발판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아 조약에 동의했고, 조약 반대파는 완전한 독립과 아일랜드 분단을 이유로 반대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조약 비준안이 근소한 차로 통과하자 에이먼 데 벌레라 등 조약 반대파는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의 모든 지위에서 사퇴하고, 별도의 무장세력을 꾸려 아일랜드 내전을 개시했다. 이 와중에 독립영웅 중 마이클 콜린스가 1922년 8월 조약 반대파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결국 아일랜드 내전은 조약 찬성파의 승리로 끝났다.한편 이 내전은 아일랜드 역사학을 비롯한 아일랜드 향토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내전은 앞서 말한 조약 반대파가 더블린의 아일랜드 대법원인 포 코츠(Four Courts)를 점거하고, 자유국 정부군이 이를 진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 코츠 바로 뒤에 있던 문서 보관소가 포격에 피해를 입으면서 수백년에 걸쳐 쌓인 아일랜드 관련 기록물이 대규모로 손실되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 향토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는 심각한 자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11.4. 독립[편집]내전이 끝난 후 데 발레라를 비롯한 많은 조약 반대파측 인물들이 체포되었으나, 내전이 끝난 직후 유화정책을 취한 자유국 정부에 의해 대부분이 짧은 기간 안에 풀려났다. 1926년 반조약파의 거두였던 에이먼 데 벌레라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합법 투쟁을 주장하며 자유국의 정계에 참가할 것을 선언했고, 피어너 팔(공화당)을 창당하여 이듬해 의원에 당선되었다.피어너 팔이 집권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은 더욱 가속화된다. 피어너 팔이 집권한 1932년부터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의 흔적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의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1937년 ;을 선포하면서 국명을 에이레(영어명 아일랜드)로 변경했고, 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집무실을 폐쇄했으며, 더 이상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자유국 성립 시기부터 영국 국왕과 그가 임명하는 총독에게는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아일랜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 입장을 취했다. 아일랜드 국내는 독일 편에 참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아일랜드를 연합군 편으로 참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음에도 아일랜드는 중립에 머물렀다. 일부 의용군이 개인 자격으로 영국군에 가담한 것이 전부이다.11.5. 2차 대전 이후[편집]1948년 제2차 세계 대전 후 ;을 제정해 UFC 무료 PC 주말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서 예우한다는 조항을 완전히 폐지했다.1949년 영국은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마침내 승인했다.독립과 전후 시기 아일랜드 인구는 조금씩 증가하기도 했지만 오랜 정체를 겪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빈국으로 남아있던 아일랜드는 상당 기간 인구 성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서 다시 일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45].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장 개방을 통해 이민을 많이 받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해 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면서 서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된다. 이 과정에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구제 금융을 받을 정도로 타격을 꽤나 심하게 받았으나 현재는 꾸준한 회복세를 보이는 중이다.4. 인구[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인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아일랜드인의 신체적 특징으로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람들에 비하여 머리색이 어두운 편이지만 눈동자와 피부색은 밝은 편이라는 것이다.[13] 일반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람들이 멜라닌 색소가 적은 금발벽안을 지니고 남유럽의 사람들은 주로 어두운 눈동자와 머리색을 지니고 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경우 특이하게 이러한 특징들이 정반대로 나타나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처럼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였던 켈트족과 서고트족이 북유럽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물론 머리색이 북유럽과 서유럽의 백인들에 비해서 어둡다는 것이지 사실 금발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다.[14] 그리고 가장 독특한 것은 적발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라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현대에서는 희귀한 자연 적발의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서양에서는 아일랜드 여성들이 신비로운 미녀가 많다고 이야기한다.[15] 그리고 타 유럽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러 머리색의 비율이 고른 편이다.아일랜드는 현대에 들어서 인구가 계속 줄어들기 시작해 1960년 정도까지 인구가 감소하는 사태를 맞았지만 이후에는 서유럽의 주변 국가가 인구가 정체했던 것에 비해서 빠르게 성장했고 1990년을 전후해서 잠시 인구가 줄어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인구가 계속 증가해 왔다. 최근에는 아일랜드의 인구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서 엄청난 증가를 보였던 때도 있다.[16]1950년부터 현재까지의 전체 인구는 다음과 같다.시기전체 인구1950년2,969,000명1955년2,921,000명1960년2,834,000명1965년2,876,000명1970년2,950,000명1975년3,177,000명1980년3,4년3,541,000명1990년3,5년3,6년3,849,000명2005년4,213,000명2010년4,627,000명2015년4,7년4,804,000명4.1. 출생 인구[편집]2000년부터 현재까지의 출생 인구는 다음과 같다.시기출생 인구2000년56,000명2005년61,000명2010년74,000명2015년66,000명4.2. 기대 수명[편집]1965년부터 현재까지의 기대 수명은 다음과 같다.시기기대 수명1965년70세1970년71세1975년71세1980년72세1985년73세1990년74세1995년75세2000년76세2005년78세2010년80세2015년81세4.3. 출산율[편집]1965년부터 현재까지의 출산율은 다음과 같다.시기출생율1965년4.07명1970년3.77명1975년3.82명1980년3.25명1985년2.76명1990년2.18명1995년1.91명2000년1.94명2005년1.97명2010년2.00명2015년2.00명5. 정치[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아일랜드/정치최근 수정 시각: 2023-03-01 10:27:40부패인식지수722020년, 세계 20위언론자유지수88.302022년, 세계 6위[1]민주주의지수9.002021년, 세계 7위1. 개요[편집]아일랜드의 정치를 설명하는 문서이다.2. 정부조직[편집]아일랜드는 의원내각제(의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양원제다.정부조직은 아일랜드 헌법에 따라 구성된다. 아일랜드의 헌법상 제 1공용어는 아일랜드어지만 실상은 제 2공용어인 영어가 통용된다. 따라서 헌법은 아일랜드어본과 영어본 두 종류가 존재하며, 각 언어에 따라 해당 언어의 단어들을 정부조직의 명칭으로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한 언어로 통일해서 부른다. 자세한 사항은 아일랜드 헌법을 참고할 것.아일랜드어로 명칭을 통일한 경우 영어에서도 아일랜드어 명칭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2.1. 의회[편집]An Oireachtas[2] / The Oireachtas아일랜드의 의회. 본래 자유민이나 부족장의 모임을 의미하는 oireacht라는 말에서 따왔다.[3] 아일랜드 의회는 대통령과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4]아일랜드 의회는 하원인 Dáil Éireann과 상원인 Seanad Éireann으로 나뉜다.[5] 상원에는 별 권한이 없고 하원이 정국을 주도한다. 다음에 서술할 총리, 하원, 상원의 명칭은 영어에서도 아일랜드 명칭을 따른다.2.1.1. 하원[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하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2.1.2. 상원[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상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2.2. 대통령[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대통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2.3. 행정부[편집]2.3.1. 행정부 조직과 내각[편집]아일랜드 정부는 17개부, 200개 에이전시(국, 처 등에 대응됨), 31개 지방정부로 구성된다.총리는 부총리(Tánaiste)를 임명한다. 총리, 부총리, 재정부 장관은 반드시 TD중에서 뽑혀야 하며, 나머지 구성원은 하원과 상원에서 선발해야 하지만 상원의원은 2명까지만(not more than 2) 임명할 수 있다.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인물들은 의회에서 청문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정부는 하원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6]자세한 사항은 아일랜드 헌법 28조, 28조A, 아일랜드 정부 참고.2.3.2. 총리[편집]Taoiseach[7][8]아일랜드의 행정수반. 내각의 장.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영어로 표기할 경우 관사만 영어로 바꿔서 the Taoiseach로 표기한다.총리는 다음 절차를 통해 임명된다.1. 일반적으로 총선에서 가장 많은 1선호표를 받은 정당의 대표가 총리 후보로 하원에서 신임 투표를 받는다.2. 하원의 신임투표는 단순다수결이며 이 투표에서 반대표보다 많은 찬성표를 얻은 경우 총리로 선출된다. [9]3. 대통령에 의해 총리 당선자는 '공식적으로' 총리에 임명된다.총리 후보가 하원에서 선출되지 못한 경우 그는 사임하거나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을 통한 재선거를 요구할수 있다. 대통령은 의회 해산을 거부할수 있으나 이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한 적은 없다.의회는 불신임결의 등을 통해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으며, 총리가 사임하는 경우 그의 후계자가 임명될 때까지만 임기를 대신하게 된다.3. 유럽의회 선거[편집]유럽의회는 개성이 강한 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에 걸쳐 있는 의회라서, 선거구 획정과 선출 방식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회원국이 직접 결정하게 하고 있다. 선거구의 경우 회원국 전체를 통째로 지역구로 설정할 수도 있고, 여러 지방으로 나눌 수도 있다. 다만 그렇다고 회원국들이 아무 제한 없이 맘대로 투표 방식을 정하는 건 아니고, 비례대표제에 해당되는 방식 중 한 가지로 정해야 한다. 단 해당국이 의원 1명만 배정한 지역구를 뒀다면 비례대표제를 쓸래야 쓸 수가 없으므로 예외가 된다.아일랜드에는 총 13석이 할당되어 있다. 아일랜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단기이양식 선호투표제를 택하고 있으며, 전국을 더블린, 북부, 남부의 세 선거구로 나누어 각각 4석, 4석, 5석을 선출한다.4. 정당[편집]중도 정당과 중도우파 정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한 양당제 체제였다. 보수양당제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 표현 자체가 일반적으로 그리 통용되는 표현은 아니다. 게다가 보통 이런 표현은 중도 정당이 리버럴 성향의 정당으로 사실상 좌파 지지층을 흡수해 점점 좌클릭 되는게 대부분인데 반해[10], 아일랜드는 두 당의 성향이 후술되어있듯 죄다 중도주의 비슷하게 수렴되어 지금도 정책만으로는 구분이 쉽게 가지 않는 좀 특이한 사례긴 하다.[11] 다만 양당 지지자들간의 반목과 분열은 엄연히 존재한다.2020년 총선으로 인해 기존 양강 체제는 좌파 성향의 신페인을 포함한 3강 체제로 변화했다.피어너 팔(Fianna Fáil)아일랜드의 전사들이라는 뜻으로, 영명은 공화당이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정당으로, 유럽연합에 대한 아일랜드의 주권을 지지하며 이몬 데 발레라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조약 반대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래도 집권 역사가 길다보니 아일랜드 내 정서적 측면에서는 피너 게일보다 주류 정당 이미지가 있다. 정책은 이쪽도 피너 게일과 비슷하거나 다소 중도적이다. 성향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라 현대 들어선 중도좌파적 색채도 강해졌다. 그러나 피너 게일이 노동당과 연대해서...응? 정책에서 양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점이 아일랜드 정치의 중도주의로 수렴하는 기능 중 하나를 담당한다. 노동자 계급과 아일랜드 북부 지방을 포함한 전국 각 지방 단위에서 고르게 지지를 얻고 있다. 2020년 총선에서 38석으로 원내 1당의 위치를 탈환했다.피너 게일(Fine Gail)아일랜드 가족이라는 뜻으로, 영명은 통일 아일랜드당이다. 아일랜드내 중도우파와 자유보수주의를 대표한다. 유럽연합과의 통합을 찬성하며 마이클 콜린스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조약 찬성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통 집권시에는 중도좌파 성향의 노동당과 연대하는 편이다. 덕분에 피어너 팔과 이념적, 정책적 측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고, 선거에서도 아일랜드 유권자들은 자기 가족들의 투표 성향을 보통 따라간다.(...) 이 당을 지지하는 가정이 피어너 팔을 지지하는 쪽보다 다소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도시에 거주하거나 자유주의 성향일 수는 있다. 근래 들어 긴축정책과 대유럽정책은 평균적인 유럽의 중도~중도우파 범주에 들어간다. 더블린 남쪽 및 아일랜드 남부지역과 중산층 및 부농을 지지기반으로 두고 있다. 2020년 총선에선 14석을 잃으며 원내 3당으로 내려앉았다. 피어너 팔과는 3석 차이.신페인(Sinn Féin)We Ourselves, 우리 스스로 라는 뜻으로 의역하면 독립당 정도가 될 듯 하다. 급진좌파 입장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최후까지 반대하여 투쟁한 사람들이 평화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만든 정당이다. 위 두 양당도 신페인당을 모태로 하나 신페인의 투쟁 정신을 포기하고 의회 정치에 처음부터 발을 들였고, 그 과정에서 우경화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환경주의와 좌파 민족주의 입장을 겸한다. 2020년 총선에서 37석으로 원내 제 2당을 차지하며 3강 체제의 막을 올렸다.노동당중도좌파 입장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과는 그리 관계가 없는데, 영국-아일랜드 조약 당시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기권했다. 아일랜드 경제부흥의 주인공인 메리 로빈슨 대통령이 이 당 소속이다. 실제로 하는 정책을 보면 친시장 기조인 통일당과도 그리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FG와 연정을 이루어 집권한 이후에도 사실상 FG에 끌려다녔고, 수도세 정책을 도입하는 데 협조하는 바람에 FG와 묶여서 세트로 까였다.(...) 그리고 2016년 2월 총선에서는 폭망. 2020년 총선에서도 6석이라는 소소한 의석을 차지했다.S-PBP (구 AAA-PBP)연대(Solidarity)[12]와 PBP(People Before Profit, 이윤 이전에 인민)의 선거연합체. 신페인이 좌파 사회민주주의(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를 목표로 하는 정당인 반면 이들은 혁명을 통한 근본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연합체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로 정치적 지지 기반을 넓혀 나간 여러 트로츠키주의 운동 단위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정당으로, 2016년 총선에서 반긴축 구호를 앞세워 무려 6석을 얻었다. 한국의 노동자연대와 같은 IST(국제 사회주의자 경향)에 속한 아일랜드 사회주의 노동자당도 PBP의 일원으로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13]5. 기타[편집]세계 최초의 여성 내각 각료는 아일랜드에서 나왔다. 1919년에 아일랜드가 독립을 선포한 직후 콘스탄스 마르키에비츠(Constance Georgine Markievicz)가 노동부 장관을 역임(1919년~1922년)했다. 성이 폴란드식인 이유는 남편인 마르키에비츠(Casimir Dunin Markievicz)가 폴란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콘스탄스 본인은 런던에서 태어난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이다. 심지어 영국 귀족 집안출신이다. 콘스탄스의 아버지인 헨리 고어부스(Henry William Gore-Booth)는 5대 준남작(Baronet)이었다.콘스탄스는 명목상 영국 의회 최초의 여성 의원이기도 한데, 1918년 12월 신페인 소속 아일랜드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페인의 당론을 따라서 의회에 출석하지 않고 아일랜드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보통 영국 최초의 여성 의원은 그 다음 해인 1919년 당선된 낸시 애스터(Nancy Astor)를 꼽는다.[14]6. 군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아일랜드군최근 수정 시각: 2023-03-23 23:41:511. 개요[편집]아일랜드의 군대이다. 규모는 현역이 약 9천 명이며 예비역이 4천 명 수준이다.2. 통수권[편집]군 규모가 작다보니 장성급 장교의 숫자가 적다. 영국의 영향을 받아 군복 가운데 항공대 정복에도 수장이 달려 있다. 아래의 참모차장(Deputy Chief of Staff)이나 참모차장보(Assistant Chief of Staff)들이 군종이 다른 것을 보면 알겠지만 합동군의 형태를 띄고 있다. 다만 합동군이라고 해도 육군의 장성 보직 자리가 많은 편이다.유엔군사령부 쪽에도 아일랜드군 육군소장이 한 명 파견되어 있다.사단이 2개나 있는데, 육군 규모가 7,500명 수준이라는걸 감안하면 실제 규모는 연대급이다.2.1. 아일랜드군의 역대 참모총장[편집]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군/역대 참모총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3. 역사[편집]1924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기원은 1913년에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민병대 아일랜드 의용군이다. 이 조직은 1919년에 IRA가 되었고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건국되자 IRA에서 인원들이 파입되어 아일랜드 국방군이 되었다. 아일랜드어 정식 호칭인 Óglaigh na hÉireann를 IRA의 분파들[9]도 사용하는데 아일랜드군은 당연히 다른 조직의 해당 용어 사용에 부정적이다.영국군과 영연방 소속 국가들이 군사 교류를 자주 하는 것과 달리 아일랜드군은 미군과 교류하고 있다. 다만 중립국이다 보니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은 아니다. 비록 여러 문제상 실제 운용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제식 구령 등은 아일랜드어를 쓴다.아일랜드가 중립국이다보니 전투경험은 대부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습득하고 있다. 첫 파병은 1960년 1차 콩고 내전이었는데 이것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첫번째 국제활동이기도 했다. 여기 파병되었던 아일랜드군 알파중대는 "자도빌(Jadotvil)"이라는 작은 마을을 150명 병력으로 3000명 가량의 카탕가 반군 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프랑스계 백인 용병단에 맞서 한계까지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병력도 부족했지만 무장도 구닥다리였다. 대다수의 장병들이 리-엔필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일부만이 FN FAL의 반자동형이자 영국군도 냉전기 내내 제식으로 사용하던 L1A1 SLR로 무장하였을 뿐이었다. 그나마 장교진과 통신병 등이 칼 구스타프 m/45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지라 자동화기가 부족했으며 보유한 기관총 또한 2차 대전에서나 써먹었을 구닥다리 수랭식 빅커스 기관총이나 탄창식 브렌 경기관총이었다. 심지어 헬멧조차도 아무런 방탄 기능이 없는 UN 평화유지군 도색이 되어 있는 플라스틱제 브로디 헬멧이었다.[10] 단 한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고 급조 부비트랩을 제작해 방어진에 매설해 터뜨리거나 쉴새없는 저격으로 카탕가 반군 세력과 이들을 지원하는 프랑스 용병단에 맞서 큰 출혈을 강요하며 저항했다.그러나 자도빌 전투에서 용전분투한 이들은 상징적인 첫 파병활동에 항복을 했다는 이유로 유엔과 아일랜드 정부에게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도빌의 바보들"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이들은 2005년에 재평가돼서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고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16년에는 이들의 사투를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하기도 했다. 제목은 ;.4. 구성[편집]4.1. 육군[편집]영어: Irish Army아일랜드어: an tArm규모는 현역 7,500명으로 아일랜드군에서 가장 인원이 많다. 역사 때문인지 섬나라인데도 항공대, 해군보다 육군의 비중이 더 강하다.이란, 보스니아, 소말리아, 이라크, 동티모르 등 파병 경력은 상당하다. 1960년 이래로 파병 근무 중에 순직(전사)한 아일랜드 군인이 86명에 달할 정도이다.코크에 주둔하는 1여단, 더블린에 주둔하는 2여단이 주력이며 단급부대인 국방군훈련센터(Defence Forces Training Center)가 킬데어에 위치한다.보병의 경우 7개 대대와 독립중대 2개이다. 1개 독립중대만이 기계화보병이고 나머지는 알보병.방공포병도 육군포병 소속이다.기갑부대의 경우 3개 대대(Squadron) 수준이다.4.2. 항공대[편집]영어: Air Corps아일랜드어: an tAerchór통상적인 공군에 대응하나, 그 규모로 인해 항공대(Air Corps) 수준에 머물러 있다.라운델은 위와 같다. 켈트족의 방패 문양이 기원이다. 삼태극 무늬와 비슷하다. 현역 791명 수준으로 한국의 비행단보다 작은 편이다. 다만 사령관은 준장 계급으로, 규모에 비해 계급은 낮지 않다.1939년부터 1954년까지 사용한 라운델은 태극 무늬와 비슷하다. 전투기로 PC-9을 운용하며 수송기로 CN-235 등을 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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